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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이야기16

고하도 이야기 고하도는 목포의 유달동에 속해 있는 조그만 섬이 지만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목포대교가 놓여 있고 주변 지역이 매립되면서 섬아닌 섬이다. 고하도는 보화도, 비하도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운다. 서남해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영산강의 빗장 역할을 하는 지리적 특성이 있다. 고하도 이충무공 유적은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이 전략지로 활용하여 왜적의 침투를 막아낸 곳이다. 충무공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인 1597년 10월 29일 이 곳에서 이듬해 2월 17일 고금도로 옮기기 까지 106일간을 주둔하며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 하였다. 섬둘레가 불과 12km 밖에 되지 않지만 이 곳이 무너지면 호남의 곡창지대를 흐르는 영산강을 왜구에게 내어주는 샘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지역.. 2018. 6. 4.
예향 목포 목포하면 떠오르는 것이 예향의 도시이다. 근대화의 문물을 다른 도시에 비해서 빨리 받아들이 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그의 영향으로 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도시이다. 그래서 목표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에 대해서 한번 알아 보려고 한다.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 1916년 목포시 양동 출생으로 12살까지 어린 시절을 보내고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중퇴하였다. 13살 무렵에는 어머니 오빠와 제주도에서 지내다가 1932년 16살때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난영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생활을 하다. OK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의 눈에 뛰어 1935년 을 발표하면서 일약 대중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 난영의 대표곡으로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는 곡으로 일제하에서 힘들고 슬플때 우리 민족의 시름을 달려주던 노래였다. 이난.. 2018. 6. 4.
목포의 항일 유적 목포는 1897년 개항 된 이후 일제 수탈의 전진기지역할을 하는 가슴 아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는 운동에 중심에 서 있었으며 독립운동에 기독교와 교회가 중심에 있었다.목포의 3*1운동은 '신동아' 1965년 3월호에 실린 동암 박상렬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동경 유학중이던 동암의 친구 남궁혁이 동년 2월 귀향하여 목포에 거주하던 박상렬에게 동경의 2*8 독립 선언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국제적인 상황을 전달하며 목포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고 1919년 4월 8일에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시위로 전개 되었다. 목포 만세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상인, 학생, 기독교인 등이 주도했다는 점이며 항구하는 지리적 경제적인 발전 배경과 동시에 일제 수탈의 근거지라는 오명을 함께 지녔던 목포.. 2018. 6. 4.
김우진 유달산 자락 북교동 성당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한국 극예술의 선구자 김우진을 만나 볼 수 있다. 목포는 예향의 도시 답게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하였다. 김우진은 장성군 관아에서 태었났으며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구마모토농업학교와 와세대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24년 영문과를 졸어하였다.부친은 무안감리사를 지낸 김성규이다. 김우진은 시인을 꿈구며 구마모토 농업학교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대학시절부터는 연극을 꿈꾸며 1920년에 조명희, 홍해성, 조춘광등과 함께 연극 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동우회순희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순회공연을 했는데 이 때 공연비 일체와 연출을 담당했고, 상연 극본인 아일랜드의 극자가인 던세니의 "찬란한 문"을 번역했다.가정 사회 애.. 2018.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