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는 1897년 개항 된 이후 일제 수탈의 전진기지역할을 하는 가슴 아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는 운동에 중심에 서 있었으며 독립운동에 기독교와 교회가 중심에 있었다.
목포의 3*1운동은 '신동아' 1965년 3월호에 실린 동암 박상렬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동경 유학중이던 동암의 친구 남궁혁이 동년 2월 귀향하여 목포에 거주하던 박상렬에게 동경의 2*8 독립 선언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국제적인 상황을 전달하며 목포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고 1919년 4월 8일에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시위로 전개 되었다. 목포 만세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상인, 학생, 기독교인 등이 주도했다는 점이며 항구하는 지리적 경제적인 발전 배경과 동시에 일제 수탈의 근거지라는 오명을 함께 지녔던 목포의 항일 정신은 1919년 4월 8일 만세운동 이후 일제 강점기 내내 저항과 민족운동을 통해 1921년의 정명 영흥의 만세운동까지 그 맥을 이어 갔다.
목포 양동교회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8일 목포의 3*1운동을 계획하고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곳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양동교회 교인들은 영흥학교*정명여학교 학생들고 태극기와 전단을 제작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목포상업학교와 목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참여시키기로 하고 각각 임무를 분담한 뒤, 목포시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4월 8일 양동교회 교인들은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앞장섰다. 이날의 만세시위로 수많은 교인들과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시련을 겪었다.
4*8만세운동
목포정명여학교는 1903년 설립된 호남지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1919년 전국적으로 펼쳐진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여 정명여학교의 여학생들이 의로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목포의 만세운동은 광주에서 있었던 만세운동보다 다소 늦긴했지만 여학생들을 주축으로 발생한것이 특징이며 만세운동의 주요 발원지는 1919년 4월 8일 목포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 일대였다.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정명여학교의 교장이었던 김아각 목사는 광주에서 독립선어서, 2*8독립선언서 사본, 결의문 등이 담긴 봉투를 은밀히 전달받았다. 이후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목포 양동교회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비밀스럽게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1919년 4월 8일만세운동을 거행하였다. 한편 여성독립운동의 산실인 정명여자중고등학교에서는 매 해 4*8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하며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고 있다.
3*1 독립운동탑
이 탑은 3*1 독립만세 사건 발생이후 1919년 4월 8일 목포시 주민등 만세사건 참여자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발전 시키기 위하여 1983년 8월에 건립하였다. 자주독립적인 대한제국의 주권을 무력으로 찬탈한 침략주의 일본의 강제 통치로 말미암아 암혹과 직곡에 신음하던 한민족은 마침내 1919년 3월 1일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세계 만방에 선언하고 일제히 궐길 하며 독립만세를 고창, 방방곡곡에 태극기의 물결이 일어났을 때 우리 고장 목포에서도 역상의 소명 아래 박상렬의 주도로 이해 4월 8일 상오 10시를 기해 시민과 학생이 총궐기 독립선언문과 경고문을 살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여 일제를 놀라 떨게 함으로써 한인의 독립 혼을 만방에 널리 알렸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80여명이 체포되어 심한 구타와 고문에 시달렸고 그 휴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한편 3*1독립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기 위하여 매년 4월 8일 독립만세운동 제현 행사가 이곳에서 실시되고 있다.
여러 역사의 자료들을 통해서 목포가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개항 되었고 그 것으로 성장하게 되었지만 불의에 대해서 저항하였고 이 민족을 사랑했던 마음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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