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의 국도 2호선 기행의 출발지인 목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유달산이라고 할수 있다. 유달산 둘레길은 노적봉 관광 안내소가 있는 노적봉에서 출발하여 유달산 전체를 6.3km 정도를 천천히 걸으면 3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유달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건강을 챙길 수 있다.
유달산은 목포의 상징으로 높이는 228.3m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으로 이어지는 영산기맥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이다. 유달산의 이름은 옛 문헌에 대부분 놋쇠 유로 등장하지만 구한말에 선비유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선 정상 부근에 봉수대가 있었고 이순신 장군의 전설이 서린 노적봉 등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유달산은 신선이 춤을 추는 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바닷가에 위치하며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다.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유달산 일등바위에서서 심판을 받은 뒤 이등바위로 옮겨져 대기하다가 극락세계로 가게 되면 3마리의 학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이 실려 떠나고 용궁으로 가게 되면 거북섬으로 가 거북이 등에 실려 떠난다는 전설이 있다.
제2 수원지터
1897년 개항이루 목포가 도시로 발달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건축을 위한 토지 공간 확보와 부족한 식수를 해결하는 것으로 물 문제 해결을 위해 축조하였다.(1910년 9월~1912년 12월) 유역면적은 0.1km, 저수량은 3.697m로 일본인 거주지 구역의 중요한 급수원이었으며, 여기를 옥지라 하여 주변에 벚나무를 심어 유원지화 했다. 일제강점기 말엽 이 자리에 신사를 지으려고 중요시설은 전부 파괴 매몰하였으며 광복후인 1955년 일부 시설을 복구 신설하여 용연이라 이름 붙여 사용하다가 인명사고가 자주 일어나서 1985년 5월 폐쇄하였다.
아리랑 고개
가파른 고개를 넘으며 힘겨움을 달래기위해 '아리랑'을 부르며 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전국에 있는 '아리랑고개'의 유래가 이와 거의 비슷한 점. '아리랑'의 본고장인 진도사람들이 온금동에 집단 이주해와 살았던 점 등이 이를 뒷 받침하고 있다.
온금동
유달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한 따뜻한 구미(바닷가나 강가에 물이 땅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로 다순구미라 불리웠으며, 이름 한자로 옮겨 온금동이라 했다. 산제당터, 우물, 아리랑고개, 옛 조선내화 건물,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남아있으며 매립으로 인해 명물 "째보선창"은 사라졌다. 백두대간으로 통하는 영산기맥의 시발점이다.
채석흔적
유달산 곳곳에는 채석 흔적이 많다. 주로 집을 짓거나 담을 쌓는데 사용하였다. 유달산 근처에 양동교회나 근대 역사관 남진 생가등 오래된 건물들은 유달산의 돌을 이용해서 담을 쌓았다는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옛 사람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판 구멍에 겨울철에 물을 붓고 얼린 얼음이 내는 팽창압을 이용하거나, 마른 나무를 박아 넣고 물을 부어 나무의 팽창력을 이용하기도 했다. 고인돌이나 이집트 피라미드 돌도 이런 방법으로 채석했다.
해넘이가 아름다운 낙조대
이곳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해넘이는 붉게 물든 바다 점점이 떠 있는 섬 오고가는 배들이 함께어우려져 장관을 연출하며 목포대교의 야경도 환상적이다. 바로 앞 바다 건너 고하도는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07일 동안 머물면서 전력을 재정비해 노량해전의 밑거름이 되었던 곳이다. 고하도 용오름길의 아기자기한 바위능선을 따라 목포항을 바라보며 걷는 맛이 일품이다.
군왕지지의 터 나숭대 골짝
고하도의 용머리가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나숭대란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묘를 쓰고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자기 집 대들보에 숨었지만 옷고름이 삐져 나와 관군에 발각돼 잡혀 죽었다고 전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나주 사람 나숭대가 1728년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죄로 참형에 처해졌으며 가산은 적몰댔다는 기록이 있다.
봉후샘터
유달산 봉우리 뒤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봉후동이라 하며 봉후마을에 있는 우물이라하여 봉후샘터라 한다. 이곳은 20~30여년전만 해도 근처에 민가가 있었고 이 우물은 당시 동네 주민이 물을 길러다 사용했으며 식수와 빨래터 등 공동 우물터로 이용했던 곳이다. 주변에 담장과 소나 돼지의 가축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이 있다.
목포시사
1890년 여구항,허석재,박만취 등이 이고장 문인들에게 시문을 가르치기 위해 건립한 '유산정'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한말의 대학자인 정만조가 1907년 세운것이다. 목포시사는 시인들의 단순한 모임을 넘어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유림의 문학결사 단체이기도 했다. 시에 뜻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입사할 수 있으나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한다. 지금도 매년 봄, 가을이면 이곳에서 한시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한시의 명맥을 이어온 우리나라에 하나 밖에 없는 시사이다. 무정 문집과 구한말의 전적 창사이래 개최된 백일장에서의 입선작 문인들의 원고를 모두 보존하고 있다.
유달산 둘레길을 걷다가 보면 목포의 역사와 유달산의 소소한 역사와 스토리를 볼수 있어서 기쁨을 누리게 된다. 또 다른 풍경은 올해 8월을 개통을 바라보고 있는 케이블카 작업이 한창이다. 이 아름다운 풍경들이 손상 되는 아쉬움이 있지만 아름 다운 풍경들을 새로운 모습으로 볼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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