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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이야기

목포 공생원

by 곰네마리가족 2018. 7. 4.



남도의 끝자락인 목포에는 사회복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공생원이라는 복지 시설이 있다.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에 위치하고 있는 공생원은 1928년 "거지대장"으로 불렸던 기독교 전도사 윤치호가 7명의 부모 잃은 아이들과 함께 같이 생활하게 된 것이 공생원의 시작이라고 한다. 

윤치호는 전남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 출생으로 파평윤씨 종손이다. 10세 때에 함평장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제 만행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12세에는 부친이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누님과 동생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18세에 목포에 진출하여 나사렛 목공소를 세워 전도활동을 하다 일본 천황의 신격을 부인하여 경찰에 구속 되기도 하였다.당시 목포는 부산, 인천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항구로서, 중국의 대련, 상해와 일본을 연결하는 항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기에 번창해 가는 참이었다. 특히 호남일대에서 생산되고 있는 삼백을 실어 내는 항구로서 그 중요성은 날로 더해가고 있었다. 

1937년 공생원을 시작하였는데 이웃 주민들과의 잦은 갈등과 불화 때문에 공생원을 대성동에서 임성리로 용당동으로 옮겼다가 현재의 목포시 죽교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38년 봉사정신이 각별했던 일본인 여성 다우치지즈꼬(한국명:윤학자)와 결혼하여 어려운 가운데 해방을 맞으며 고아들을 보살피는데 전념했었다. 1951년 6,25 사변으로 광주에 식량을 구하러 갔던 윤치호가 행방불명 되었으나 다우치지즈꼬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아이들을 키웠으며 고아들의 어머니로 칭송받았다. 그 공로로 1962년 한국 정부의 문화훈장을 받고 1965년 제1회 목포시민상을 1968년 일본황실에서 남수포장을 받는 등 민간대사로써 한일 가교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생원은 한국 사회복지 역사의 뿌리가 되어 현재까지 4천명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자라 사회의 일원으로 꿋꿋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생각하면 일본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있는데 윤학자 여사는 목포의 고아들을 위해서 평생의 삶을 바친 인물이다. 그것 뿐만 아니라 본국인 일본에서 고아들을 돕기 위해서 모금 활동을 하여서 아이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받치 인물이다. 1969년 윤학자 여사가 돌아 가셨을 때에 목포시민장으로 연결식이 진행 되었다. 

1995년 공생원과 윤학자여상의 생애 "사랑의 묵시록"가 한일 공동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게 한 터전이기도 하다. 석조건축물인 공생원 사무실 건물은 목포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도 전국에 있는 복지시설이나 복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법인으로 지역에 고아들 뿐만 아니라 장애인, 미혼모등을 위한 사회 복지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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