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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이야기

예향 목포

by 곰네마리가족 2018. 6. 4.

목포하면 떠오르는 것이 예향의 도시이다. 근대화의 문물을 다른 도시에 비해서 빨리 받아들이 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그의 영향으로  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도시이다. 그래서 목표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에 대해서 한번 알아 보려고 한다.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 

1916년 목포시 양동 출생으로 12살까지 어린 시절을 보내고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중퇴하였다. 13살 무렵에는 어머니 오빠와 제주도에서 지내다가 1932년 16살때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난영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생활을 하다. OK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의 눈에 뛰어 1935년 <목포의 눈물>을 발표하면서 일약 대중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 난영의 대표곡으로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는 곡으로 일제하에서 힘들고 슬플때 우리 민족의 시름을 달려주던 노래였다. 이난영 여사와 목포의 눈물은 우리네 삶속에서 기쁠 때나 슬플때나 항상 함께하며 영원히 잊혀 지지않고 기억될 것이다. 오빠 이봉룡, 남편 김해송은 유명 작곡자이며, 자녀들도 '김시스터즈'등의 이름으로 미국에서 활동 했다.

 


대표적인 여류 작가 박화성 

1915년 목포 정명여학교를 거쳐 1918년 서울의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충남 천안과 아산에 있는 보통학교 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2년 전남 영광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3년여를 영광에 머무르는 동안 시조작가 조운 등과 사귀면서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하였다. 1925년 "추석전야"가 이광수에 의하여 "조선문단"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1926년 숙명명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보능로 건너가 니혼여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김국진과 혼인문제 등 개인 사정으로 1929년 3학년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32년 "하수도공사"가 이광수에 의하여 "동광"에 다시 추천되어 작가 생활을 재개하였다. 그해 첫 장편소설 "백화"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그후 작품활동을 계속하는 동안 20여편에 이르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거의 일제의 침탈로 고통받는 도시 노동자나 서민 그리고 농민을 다룬 것이어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차범석

목포 출신의 극작가 이며 목포 북교 초등학교와 목포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경력도 있다. 1946년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연희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여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밀주, 귀향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주로 사회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의식이 강한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불모지(1957년)와 산불(1962년)은 반전의식을 일깨운 전후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며 MBC드라마 전원일기의 극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목포와 관련된 작품으로는 희곡 "학이여, 사랑일레라"(1981년) "옥단어!"(2003년)가 있다.


남진 

이난영의 뒤를 이은 목포 출신 인기 가수이다. 본명은 김남진이고, 그이 부친은 목포의 유지였던 김문옥이다. 현재 가옥은 김문옥이 지은 것으로 남진이 태어나고 자란 근대 건축물이다. 내부에 노래 연습을 위한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남진은 "가슴 아프게" "마음이 고와야지""님과함께" "빈잔""둥지"등을 히트시켰고 60여 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배우로도 유명하다. 생가 건물의 건너편에는 부친이 운영하던 일제 강점기 정미소 건물이 남아 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정미소 중에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한다.

문학과 음악 등 여러곳에 목포 출신 예술가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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