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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이야기

김우진

by 곰네마리가족 2018. 6. 2.

유달산 자락 북교동 성당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한국 극예술의 선구자 김우진을 만나 볼 수 있다. 목포는 예향의 도시 답게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하였다. 김우진은 장성군 관아에서 태었났으며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구마모토농업학교와 와세대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24년 영문과를 졸어하였다.

부친은 무안감리사를 지낸 김성규이다. 김우진은 시인을 꿈구며 구마모토 농업학교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대학시절부터는 연극을 꿈꾸며 1920년에 조명희, 홍해성, 조춘광등과 함께 연극 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동우회순희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순회공연을 했는데 이 때 공연비 일체와 연출을 담당했고, 상연 극본인 아일랜드의 극자가인 던세니의 "찬란한 문"을 번역했다.

가정 사회 애정 문제로 번민하다가 1926년 도망해 달아나서 동경으로 갔고 그 해 8월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하여 정사했다. 그는 보수적인 유교적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서구 근대사상에 철저하게 탐닉했으며 그의 사상적 바탕이 된 니체라든가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는 물론 러시아혁명 히의 사회주에도 깊이 빠져 있었다. 

이러한 급진적 사상은 연극에서 스트린드베리의 표현주의와 전통부정정신 쇼우의 개혁 사상을 받아들이게 했으며 그에게 있어 전통인습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자세를 견지하게 만들었다. 그의 자살원인이라든가 작품세계도 이러한 사상적 측면에서 고찰 될 수가 있다.

봉권과 근대가 뒤얽힌 모순의 삶 그리고 세 형제의 아버지 김성규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의 관료를 지냈다. 무안 6대 감리사로 목포 조선인들의 인권보호에 앞장 섰다. 퇴임후 기업인으로 변모, 상성합명회사를 설립 유산시사를 창립하는 등 목포 지식인들의 상징적 인물이다.

목포 성취원 터는 김우진의 부친 김성규의 대저택이 있던 곳으로 김우진이 성취원 내 양옥 건물인 "백수재"에 머물면서 여러 작품을 집필하였다. 천주교 교구에 기부하여 현재는 북교동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목포 모던보이 1세대 삼형제의 삶은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들의 삶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 김우진은 연극인이자 목포 최초의 근대 예술인으로 근대극을 개척하고 무대에 올린 실천가이다. 사의 찬미로 알려진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 생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이다. 둘째 김철진은 조선 공산당 목포지부장, 신간회 목포 간사, 목포청년연맹 회장을 지냈다. 1930년대 우파 지식인으로 변모하였으며 부의원고 도의원을 지냈다. 1935년 호남 평론의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섯째 김익진은 사상가이자 언어학자이다. 중국 혁명군에 참여하였다가 천주교에 귀의하여 모든 유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대구에서 번역가이자 종교인으로 살아갔으며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라 불리웠다. 

해마다 5월이면 목포에서는 김우진연구회 주관으로 김우진 전국 백일장이 열린다. 이것을 보더라도 김우진이 한국의 근대 문학사에 미치 영향은 엄청나다고 하지만 삼형제가 격동의 역사속에서 겪었던 갈등은 참으로 안따깝다고 하겠다.


#김우진 # 사의 찬미 # 윤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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